월남의 역사

개요

인도지나반도 동쪽 동지나해를 끼고 남북으로 길게 뻗은 베트남은 중국대륙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까닭으로 예로부터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베트남 북부지역은 풍부한 농,수산물과 상아, 비취등 진귀한 자원이 풍족했기 때문에 중국의 침략이 잦았다. 그런 연유로 베트남은 BC179년부터 1,000여 년 동안 대륙 세력의 지배를 받았다.

16세기 초부터 서양세력의 해양진출이 본격화되면서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앞 다투어 동아시아지역으로 진출했다.그 중 프랑스와 포르투갈이 베트남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베트남은 1858년부터 100년 가까운 기간 동안 프랑스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으며, 제2차 세계전쟁 기간 중에는 단기간에 그쳤지만 일본의 지배도 받았다. 이와 같은 역사적 변천과정을 겪게 된 베트남 민족은 자신들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줄기 찬 투쟁을 계속 했다. 특히 중국으로 대표되는 대륙세력과 프랑스, 일본 등 해양세력의 지배에 맞서 저항의 역사가 장기간 계속 되면서 베트남 민족은 특유의 게릴라 전술을 반전시키게 됐다. 베트남이 역사를 시대적으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지배 시대 (BC179~AD938)

고대 베트남의 최초국가는 베트남 북부 홍(Hong)강 삼각주일대에 수립된 ‘반랑(Van Lang, BC690~257)’ 이었으며, 이어 어우락 (Au Lac, BC257~179)으로 이어졌다. 그 시기에 광저우(廣州)를 중심으로 남중국 일대에 자리 잡고 있던 한족 (漢族)의 남비엣(Nam Viet, 南越 : BC207~111)이 남하하면서 BC179 에 베트남 북부지역을 병합하였다.



이때부터 베트남은 대륙세력의 지배를 받게 되어 1,000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중국의 지배가 계속 되는 동안 베트남 토착세력들은그들에게 복종하기도 했지만 관리들의 횡포가 계속될 경우 과감하게 맞서 저항했다. 그 과정에서 베트남 사람들은 오늘날의 게릴라전과 유사한 저항방식을 터득하게 되었다. AD938년 중국에 맞서 봉기를 주도하였던 토착세력 응오꾸엔(Ngo Quyen)이 남중국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난한(南漢) 의 군대를 격파하고 독립을 쟁취함으로써, 1,000년 이상 계속되었던 대륙세력의 베트남 지배는 끝을 맺게 되었다.

베트남 전통왕조 시대 (939~1862)

중국의 지배를 물리치고 건국한 응오(Ngo) 완조(939~965)가 멸망한 후 베트남 북부에는 몇 차례의 왕조교체를 거쳐 1225년 쩐(Tran) 왕조가 등장하였다. 이무렵 중국 대륙에는 몽골이 남하하여 원(1271~1368) 나라를 건국하고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부상하면서 3차에 걸쳐 베트남을 침략하였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은 몽골의 침략에 굴하지 않고 전 국민 저항운동으로 맞섰다. 그 결과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던 몽골군도 베트남 만큼은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원나라의 멸망 이후 중국을 통일한 명(1368~1644)나라 영락제(永樂帝)가 1407년 베트남을 복속시켜 20년 동안 지배하였다. 명나라의 지배는 또 다시 베트남 토착세력의 저항을 불러왔다. 결국 끈질긴 저항을 계속하였던 레러이(Le Loi)가 1428년에 명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였다. 그 후 베트남 왕조는 강력한 남진정책을 계속 추구하여 1471년 지금의 뀌년(Quy Nhon) 남쪽까지 진출하였고, 1757년에는 남쪽 꺼머우(Ca Mau) 지역까지 점령하여 오늘날과 같은 베트남의 영토를 만들었다.

프랑스 지배 시대 (1858~1954)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였던 응웬(Nguyen) 왕조(1802~1945)는 건국 과정에서 프랑스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베트남과 프랑스는 보다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당시 유럽세력들은 적극적인 해외 팽창정책을 추구하며, 동아시아 지역으로 침략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특히 베트남을 동아시아 진출의 발판으로 이용하려 했던 프랑스는 가톨릭 탄압을 빌미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첫 번째 조치가 1858년 9월 1일 베트남 중부의 다낭(Da Nang)을 점령한 사건이다.



그 후 베트남 남부를 점령한 프랑스는 여세를 몰아 북부까지 점령하였다. 그리고 종주국 행세를 해오던 중국의 청(淸)나라를 축출하고 1885년 6월에 체결한 제2차 텐진(天津) 조약으로 베트남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에 강제 징집되어 유럽전선에 파병되었던 수만 명의 베트남 젊은이들과 프랑스에 유학했던 젊은이들이 자유주의 또는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고 돌아왔다. 그때부터 베트남에도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공산주의자 또는 민족주의자들이 나타나기 시작였으며, 호찌민(Ho Chi Minh ; 1890~1969) 역시 그들 중 한사람

일본의 지배와 호찌민정부 수립 (1945)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아시아에서는 일본군이 1940년 6월 베트남을 포함한 동남아시아를 점령하였다. 무기력하였던 프랑스의 비시(Vichy) 정권은 그해 8월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여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의 정치 경제적 우위를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일본은 1945년 3월 9일 전격적으로 프랑스군을 공격하여 무장해제를 시킨 후 베트남을 직접 지배하기 위해 베트남 마지막 왕조의 바오다이를 황제로 내세워 꼭두각시 정권을 수립하였다. 한편 프랑스 식민당국이 일본에게 굴복하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독립이 막연한 꿈이 아니라 반드시 이룰 수 있다.” 고 생각하게 되면서부터 베트남 민족주의의 운동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리고 1941년 5월 10일 호찌민이 주도하는 ‘베트남독립 동맹(약칭 Viet Minh, 越盟)’이 결성되었다. 그 때부터 ‘베트민’은 베트남 족주의 운동의 핵심세력으로 확고한 위치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1945년에 접어들어 베트민이 봉기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때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자, 베트민은 즉각 행동에 나섰다. 즉 8월 18일 하노이의 모든 공공시설을 무력으로 접수한 베트민은 일본의 꼭두각시 정권으로 간주되고 있던 바오다이 황제를 퇴위시켰다. 그리고 9월 2일 호찌민은 50만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독립선언과 함께 ‘베트남민주공화국(The Democratic Republic of Viet Nam, 약칭 Viet Nam, 越南)’ 수립을 선포하였다.

제1차 베트남전쟁 (1946~1954)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였던 응웬(Nguyen) 왕조(1802~1945)는 건국 과정에서 프랑스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베트남과 프랑스는 보다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당시 유럽세력들은 적극적인 해외 팽창정책을 추구하며, 동아시아 지역으로 침략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특히 베트남을 동아시아 진출의 발판으로 이용하려 했던 프랑스는 가톨릭 탄압을 빌미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첫 번째 조치가 1858년 9월 1일 베트남 중부의 다낭(Da Nang)을 점령한 사건이다.

1946년 12월 19일 마침내 호찌민군이 프랑스군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제1차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에서 호찌민 세력은 열세한 군사력으로 프랑스군의 반격을 저지하지 못해 결국 하노이를 포기하고 중국 국경에 인접한 산악제대에 은거하면서 장기적인 저항에 돌입하였다. 이에 따라 전투가 거듭되면서 명분 없는 전쟁에 휘말린 프랑스군은 점차 호찌민군의 게릴라전에 말려들게 되면서 불리한 상황으로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미국은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중국과 소련이 호찌민 정부를 승인하였고 특히 1950년 6월, 한반드에서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공산주의 팽창의 ‘도미노(Domino)현상’을 우려하여 프랑스를 적극 지원하기 시작함으로써 제1차 베트남 전쟁은 중국과 소련의 공산진영이 지원하는 호찌민군과 미국 등 자유진영이 지원하는 프랑스군이 대결하는 진영간의 전쟁으로 바뀌게 되었다.

프랑스는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병력을 증파하면서 호찌민과 대결하였지만 결국 베트남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호찌민군이 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의 요새지인 디엔비엔푸(Dien Bien Phu)를 함락함으로써 프랑스는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명분을 잃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1954년 7월 20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호찌민 세력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북쪽은 호찌민 세력이 점령하고, 남쪽은 프랑스가 세운 바오다이 왕정이 통치토록함으로써 제1차 베트남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제2차 베트남전쟁 (1962~1973)

제1차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가 베트남을 포기하자 공산주의 팽창을 우려한 미국이 대신 나섰다. 이는 “남베트남에 강력한 반공정부를 수립하여 공산주의 도미노(Domino) 현상을 차단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미국은 프랑스 점령시절 미국으로 망명하였던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을 앞세웠다. 실권을 장악한 지엠은 1955년 10월 26일 ‘베트남공화국 (The Democratic Republic of Viet Nam, 약칭 Viet Nam, 越南)’을 수립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후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의욕이 앞섰던 지엠 정부는 무리한 정책 추진과 관리들의 부패로 주민들의 반발을 샀다. 이러는 동안 지엠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결집하여 1960년 12월 20일 임시정부 수준의 민족해방전선 (NLF : Nation Liberation Front)을 결성하고 지역별로 자위대의 군사조직인 베트콩(Viet Cong, 越共, 약칭 VC)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북베트남 정부도 산악지대에 비밀통로(호찌민 루트)를 구축하여 남베트남의 저항세력을 적극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남베트남은 전 지역이 전장으로 바뀌고 말았다. 지엠 정부의 반대 세력이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1963년 11월 1일 쿠데타 세력에 의해 지엠 정권이 실작되었으며, 이후 10여 차례나 반복된 쿠데타와 정권 교체로 민심이반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미국정부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반대세력을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1964년 8월 2일, 동낀만의 공해상을 순찰 중이던 미 구축함 매독스(Maddox)호가 북베트남 어뢰정의 공격을 받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동낀만 사건’을 계기로 미 의회로부터 전쟁 권한을 위임받은 존슨 정부는 1965년 7월 ‘베트남전쟁의 미국화’를 공식적으로 결정하면서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 무렵부터 한국을 비롯한 8개국의 군대가 남베트남에 파병되기 시작하였고, 소련과 중국은 물론 북한까지 북베트남을 지원함으로써 전쟁은 한반도의 6 ㆍ25전쟁과 유사한 국제전으로 비화되었다. “베트남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미국의 환상은 베트남전쟁이 확전을 거듭하고 있던 때인 1968년 1월 말 베트남 최대 명절인 뗏(Tet : 설날)을 맞아 남베트남 전 지역의 도시를 중심으로 NLF의 베트콩과 북베트남 정규군의 대규모 공세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 '뗏(Tet) 공세’에서 미군 1,100여 명과 남베트남 정규군 23,000여 명이 전사했으며, 민간인 사망자도 12,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NLF와 북베트남 정규군도 4만여 명 정도가 전사하고 수많은 전투장비의 손실을 입음으로써 차후 작전까지도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되었다.



따럿 군사적 측면에서 본다면 공산군(NLF와 북베트남)이 참패한 공세였다. 그러나 이 ‘뗏 공세’에서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미군이 약소국가와의 전쟁에서 고전을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이 미국의 TV뉴스를 통해 생생하게 방송됨으로써 미국의 국민들은 대대적인 반전데모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결국 존슨 정부는 1968년 3월 31일, 성명을 통해 북베트남에게 북폭중지 및 평화협상을 제의하였고, 북베트남도 이를 수락함으로써 프랑스 파리에서 평화협상이 이루어졌디만 협상은 별다른 진전이 없는 가운데 지상전투는 더욱 가열되기만 하였다. 1968년 11월,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닉슨의 베트남 정책은 미군을 축차적으로 철수시키고, 그 공백을 남베트남 정부군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이는 미국의 정책이 ‘베트남전쟁의 미국화’로부터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 정책으로 선회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닉슨은 1969년 7월 25일, 괌(Guam)에서 “앞으로 미국은 국지전 개입을 제한할 것이며, 아시아 국가들의 방위는 자국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내용의 ‘닉슨독트린(Nixon Doctrine)’을 발표하였다. 이와 같은 닉슨의 정책에 따라 1968년 말 54만8천여 명에 달했던 베트남의 미군은 1972년 말까지 2만9천여 명으로 대폭 감소되었고, 반면 1967년 말 기준, 63만여 명이었던 남베트남군은 1970년도부터 100만 명을 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외형적인 숫자일 뿐 규모와 장비면에서 남베트남군은 어느 선진국 군대에 못지 않았지만 교육훈련이 부족했고, 특히 “내 나라를 내 힘으로 지키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그 동안 지지부진했던 평화협상은 우여곡절 끝에 닉슨의 안보담당 보좌관인 키신저(Henny A. Kissinger)와 북베트남의 정치국원 레둑토(Le Duc Tho)는 1973년 1월 23일, 평화협정에 가조인하고, 1월 27일에는 유엔 사무총장이 참석한 가운데 정식으로 조인되었으며, 1월 28일 08:00(베트남 시간)부로 발효되었다. 파리 평화협정이 발효됨에 따라 미국의 개입으로 10년 가까이 계속되었던 제2차 베트남전쟁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하며, 우방국인 남베트남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참전하였던 미국과 한국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평화협정 발효 후 60일 이내에 철수를 완료한다.”는 조항에 따라 1973년 3월 26일까지 모두 철수를 완료하였다.

제3차 베트남전쟁과 남베트남의 패망 (1973~1975)

파리 평화협정이 체결되자, 협정의 이행 여부를 감독하기 위하여 캐나다, 헝가리, 인도네시아, 폴란드 정부 대표로 구성된 국제 감시위원단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조약 위반을 제재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또한 외세 척결을 외쳐오던 대부분의 남베트남 국민들은 모든 외국군이 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과 NLF의 도발에 대해 방관적 자세로 일관하였다.



평화협정이 체결될 당시 남ㆍ북베트남의 군사력은 외형상으로 비슷하였다. 그러나 남베트남에는 미군이 철수하면서 넘겨준 최신 장비와 함께 110만 명의 병력, 세계 4위를 자랑하는 공군력 등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낡은 재래식 장비와 빈약한 보급체계를 가지고 있는 북베트남과 NLF의 전력은 결코 비교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반면 전투 의지와 필승의 신념 등 정신전력까지를 고려하면 결코 우세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구분 병력수 편제 및 장비
남 베트남군 1,100,000명 편제 : 11개 보병사단, 공수사단, 해병사단, 해군 및 공군
장비 : 전차 600대, 장갑차 1,200대, 항공기 1,270대, 헬기 500대, 함정 1,500척
정규군 573,000명
지방군, 민병대 527,000명
북 베트남군 1,000,000명 편제 : 15개 보병사단
장비 : 전차 및 장갑차 600대, 항공기 342대
정규군 470,000명
지방군, 민병대 530,000명

이에 따라 1975년 1월 북베트남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자, 이에 맞선 남베트남군은 전투다운 전투도 해보지 못한 채, 1975년 4월 30일 최후의 날을 맞이하였다. 이로써 1955년 10월 26일, 지엠에 의해 건국된 ‘베트남공화국(The 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은 세계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전쟁의 대가는 엄청났다. 인명피해만 해도 남베트남 정부군 11만 명이 전사하고, 49만9천 명이 부상당하였으며, 민간인도 41만5천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북베트남 정부는 1975년, 정부군과 베트콩을 포함하여 110만 명이 사망하고, 60만여 명이 부상당했다고 발표하였다. 여기에다 산업시설 파괴까지 고려한다면 베트남 전역은 거의 황폐화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8년 11월,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닉슨의 베트남 정책은 미군을 축차적으로 철수시키고, 그 공백을 남베트남 정부군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이는 미국의 정책이 ‘베트남전쟁의 미국화’로부터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 정책으로 선회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닉슨은 1969년 7월 25일, 괌(Guam)에서 “앞으로 미국은 국지전 개입을 제한할 것이며, 아시아 국가들의 방위는 자국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내용의 ‘닉슨독트린(Nixon Doctrine)’을 발표하였다. 무력에 의해 통일을 달성한 북베트남은 국가 통합을 착수하여 NLF(민족해방전선)와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와 같은 기구들을 무력화시키고, 1976년 7월 2일, 북베트남이 주도하는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The Socialist Republic Vietnam)’에 흡수 통일함으로써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내부역량을 비축한 베트남 정부는 군국주의 국가로 변모하여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중국과 전쟁에도 승리하였다. 그러나군사적인 승리가 국민의 민생고를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결국 10대 빈국 중 하나로 전락한 베트남은 1986년 12월, 제6차 당대회에서 도이머이(Doi Moi : 쇄신) 정책을 채택하여 새로운 대외 협력관계를 구축하였다. 그 후에도 몇 차례의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오늘날의 베트남은 자본주의 국가를 능가하는 시장경제 체제로 변모하여 활기찬 경제발전을 계속해 오고 있다.

출처

  • 「베트남 전쟁과 한국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4.
  • 「통계로 본 베트남 전쟁과 한국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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