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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1년 율곡 선생이 2019년 한국에

백명환 0 488 06.10 16:03
1581년 율곡 선생이 2019년 한국에
 
조선일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     
입력 2019.06.10

외교가 경제성장 도왔는데 이젠 "발목 잡지 말라" 아우성
美·中에 모두 좋은 묘수는 없어… 국력차·가치·동맹 고려해야
자국이기주의·패권경쟁 시대… 국가는 서로에게 늑대일 뿐                  

"오늘날 나라 일이 안으로는 기강이 무너져 백관이 직무를 수행하지 않고, 백성은 궁핍하여 재물이 바닥나고 따라서 병력은 허약합니다. 무사히 날을 보낸다면 혹 지탱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전쟁이라도 난다면 반드시 무너져 다시 구제할 계책이 없을 것입니다." 요즘 이야기가 아니다. 임진왜란 11년 전인 1581년에 율곡 이이 선생이 선조에게 건의한 내용이다. 오래전 일인데도 울림이 있는 까닭은 작금의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정부의 기강이 무너지고 있다. 연이은 외교부의 실수를 말하는 게 아니다. 국가안보실장이나 외교부 장관이 건재한데 안보실 2차장의 이름이 여러 이유로 회자된다. 대통령의 총애야 있을 수 있지만 실장 패싱과 장관 패싱이 사실이면 기강 해이요 권한 남용이다. 청와대 비서진과의 알력에서 장관이 밀리면 부처 공무원들은 '윗집' 눈치만 보지 직무 수행을 제대로 않는다.

민생은 어려운데 외교가 보탬이 못 되고 있다. 외교와 경제는 무관해 보이지만 긴밀히 얽혀 있다. 지난날 우리 외교는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양자관계를 개선해서 새로운 시장을 창출했고 기업의 진출을 도왔다. 반대편의 비난을 무릅쓰고 한 한·일 수교도 같은 이유였다. 그런데 요즘 시장의 목소리는 정반대다. 글로벌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는데 '제발 외교가 경제의 발목이나 잡지 말아 달라'고 아우성이다.

안보도 허약해지고 있다. 날로 증강되는 북한의 핵 능력에는 눈감고 국방백서에도 나와 있는 탄도미사일조차 확인해주지 못한 채 한 달 넘도록 분석만 하고 있다. 있지도 않았던 김정은의 전략적 결단을 과장하며 대화만 주선한 결과, 싱가포르 정상회담 1주년에도 핵협상은 제자리걸음 중이다. 비핵화한다던 북한은 도리어 우리를 오지랖 넓다며 호통치고 있다. 이런 북한을 달래기 위해 정부는 인도적 지원을 결정했다. 쌀 지원도 준비하나 본데 북한 내 곡물 가격의 안정을 고려할 때 수요와 배분을 먼저 따져야 한다. 북한군 군량미로 전용된다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급기야 대한민국을 파괴하려 든 '6·25 전쟁' 전범도 독립운동을 이유로 국군의 뿌리로 보려 하니 애국선열이 통곡할 일이다. 일제에 항거했지만 대한민국의 적이다. 국가의 정체성은 저절로 지켜지는 게 아니다.

그나마 무사히 날을 보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미·중 무역 전쟁으로 위기가 찾아왔다. 패권을 다투는 건곤일척의 승부이기에 우리에게도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하지만 정부는 우물쭈물하고 있다. 미국도 좋고 중국도 좋은 묘수는 없다. 우왕좌왕하다가는 동맹에 버림받고 이웃에게 뭇매 맞는 최악의 상황이 올 수 있다. 미·중 간 국력 차와 우리의 가치, 그리고 동맹의 무게를 간과해선 안 된다. 중국을 최대한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만 한·미 동맹의 일원으로서 신중하게 풀어가야 한다. 이 원칙을 포기하는 순간 한국은 언제든 어느 쪽에서든 흔들 수 있는 만만한 나라가 된다.

400여 년 전처럼 한번 무너지면 다시 구제할 계책을 만들기 어렵다. 미리 문제를 찾아 예방하는 선제적 외교가 절실한 이유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 외교의 근본 문제는 무엇인가. 80년대 운동권 시각의 잘못된 접근이다. 그 결과 국제 정세의 흐름을 타기보다는 북한 문제에만 몰입한다. 무조건적인 대화 만능주의는 '김정일 정권도 우리 민족이니 외세보단 낫고, 미국은 북한에 위협이기에 핵 개발을 이해할 수 있다'는 위험한 생각을 하지 않나 걱정될 정도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 이념의 시대는 가고 현실주의가 지구촌을 휩쓸고 있다. 과거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북한 중심에서 국익 중심으로 이념에서 실용으로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북에 쏟는 외교 역량을 돌려서 주변국과 경제에 쏟아야 한다. 양자 및 다자외교를 강화하고 대외정책에 기업의 의견을 반영하며 다가올 충격을 함께 대비해야 한다. 그래야 자국 이기주의와 패권 경쟁의 찬바람이 몰아치는 긴 겨울을 견뎌낼 수 있다.

"사람은 사람에 게 있어 늑대다"는 토머스 홉스의 말처럼, 한 국가는 다른 국가에 있어 늑대다. 북한은 한국에, 한국도 북한에 있어 늑대다. 전략도 없이 끌려다니는 외교는 잔인한 늑대의 먹잇감이다. 임진왜란이야 다시 오지 않겠지만, 어렵게 쌓아온 평화와 번영이 도전받는 상황에서 정부의 무능에 대해 고언(苦言)했던 율곡 선생의 말씀이 떠오르는 근심 어린 초여름의 월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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