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외협력위원회

강기웅전우 퐁니 퐁넛 사건 글

권상일 0 940 02.14 07:19

한국군에 누명씌운 고경태의 퐁니,퐁넽을 논박한다.

강기웅 1 41 02.13 23:43

좌편향 고경태가 한국군에 누명을 씌운 퐁니,퐁넽 사건에 대한 반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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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건의개요

 

(1). 자유월남 중북부지방에 위치한 꽝남성의 베트콩요새 적색마을에서 일부 주민이 귀순함으로서 남월남군과 미군의 구호지원을 받는 전략촌으로 바뀐, 퐁니, 라는 마을의 (퐁니는미군의자매촌략) 주민 67명이 학살되는 사건이 1968. 2.12.일, 13시 30분에 발생 된다.

 

(2). 극도로 흥분한 마을 사람들은 시신 일부를 국도변에 옮겨 놓고, 한국군이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 하였다며 자유월남 행정기관에 달려가 강력 항의함으로서 이 사건은 월남사회에 신속히 알려지게 되었다.

 

(3). 마을 사람들에 의해 한국군의 이름이 거론 된 것은 사건 당일 한국군이 마을에 진입, 정찰 활동을 했기 때문인데, 이날 해병 2여단 1대대 1중대가 퐁니 마을 입구 개활지에서 수색작전을 벌이던 중, 적들의 기습적 저격으로 아군 1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게 되자, 철저한 수색 임무를 수행키 위해 상급부대의 허가를 받아 중대 병력이 소대별로 나란히 이 마을에 진입 하였고, 일렬종대의 일상적 수색 과정을 거쳐 특이 사항이 없음을 확인한 후, 11시 30분에 중대 병력이 이 마을을 통과하며 다른 지역으로 완전히 철수 한 사실이 있었다.

 

(4). 이런 사유로 인해, 주민들은 이 사건을 한국군에 의한 양민 학살로 간주 했고,이에 분개한 자유월남 정부는 남월남군의 민병대가 보호하고 미군이 지원하는 마을에 대한 한국군의 만행이라며, 이를 밝혀내기 위해 광남 성 행정기관과 지역 군 수사기관에 자체적 진상 조사를 즉시 하달함으로서 관계 수사 기관이 엄중한 조사를 즉각 시행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이 발생한 시각과 중대 병력이 마을에서 완전 철수한 시점이 2 시간이나 차이가 나는 점, 한국군의 또 다른 부대가 이 지역에서 군사 활동이나 작전 이동을 한 일이 없다는 점과 주검의 시신이 필요 이상으로 무자비하게 훼손되었고 학살 수법이 너무 잔인하다는 사실, 또한 한국군이 이렇게 무리한 학살을 자행 할 개연성이 희박하다는 점들을 남월남군 정보 부대 등과, 해병 2여단으로 부터 면밀히 확인하고는 한국군의 학살이라 단정하지 못한다. 수사 난관에 빠진 월남 조사기관은 이사건의 주안점을 다른 각도에서 고심해 찾던 중, 지역의 한-월 군사 정보대와 꽝남 성 군사행정관들의 종합 의견에 따라, 대민 사업으로 지역민들과 좋은 유대를 갖고 있는 한국군들을 궁지에 몰기위해, 한국군 위장 복장을 하고 격전지 중부지방의 양민 마을인 안전마을 등을 습격한 종전 사례들을 수집, 분석 하게 됨으로서, 이번 사건도 민족해방 전선 게릴라들의 소행으로 보아야 한다는 최종 결론을 내리고 자유월남 정부의 공식 조사를 마무리 하게 된다.

 

(5).자유월남 정부의 조사 결론이 이렇게 공인이 되자, 전쟁터의 특종을 기대하던 월남의 각종 국내외언론이 한국군 만행으로 보도하지 않았고 그에 따라 월남 사회는 평상 시 처럼 잠잠해 진 가운데, 이 사건은 월남 사회에서 당시 보편화된 베트콩의 속임 전술에 의한 피해로 정리 되었던 것이다.

 

(6).남월남 정부와 사회가 그 사건의 피해 정리를 마쳤는데 , 느닷없이 이 사건은 현장 발생 2개월 반이나 지난 1968.4.29일에 미 해병 제 3상륙전 사령부가 작성한 한 보고서의 의혹이라며 한미 고위급 군 당국 간에 새삼스럽게 다시 거론되는데, 이 보고서에 대한 내용을 주월 미군 사령관 웨스트 모오렌 장군이 채명신 장군에게 보낸 한 서신에 의해서 양국 지휘관 사이에 물밑에서 갑자기 정식 표면화 되는 일이 발생 한다.

 

 

(7).서신 내용이란; 현장 근방에 있는 다낭 미군 사령부가 작성한 보고서에 의하면 이 사건은 한국군이 연루 되었다는 의혹이 제기 되는 바, 사건이 발생한 마을 근처에 설치된 미군 간이 초소 캡소대 근무자 본 상병과 남월남 민병대 응웬 싸라는 대원이 한국군이 오전 10시 경에 마을에 진입하는 것을 보았고 오후 13시 30분에 총소리와 함께 퐁니 마을에 불길이 솟으면서 사건이 발생 했다는 진술이 있었다며, 당시 주민들이 잔인하게 난자당한 시신 (현장 마을에 가서 미군병사 본 상병이 직접 촬영 주장) 사진들을 보내니 참고해 엄중히 조처 해달라는 것 이었다.

 

(8). 편지를 읽고 난 채명신 장군은 “사건 발생 즉시 남월남 정부와 군사기관이 현장 조사를 엄격히 마친 사건인데, 미군 측에서 지금에 와서 왜 사진까지 첨부 하며 문제를 다시 제기 하는 것일가?. 만일 미군 보고서가 제시한 의혹들이 지금이라도 사실로 판명되면, 군령을 위반한 관련 해당자들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여 파월군의 기강을 엄히 세워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채명신 사령관은 진상을 철저히 파악하기 위해 청룡 제 2 여단 사령부에 여단 사령관이 책임을 걸고 엄중하게 사건 조사를 하도록 엄명 지시한다.

 

(9). 한국군 해병 여단 군 수사 기관은 채 사령관의 추상같은 특명에 따라 당시 관련 장병들을 모두 일일이 직접 조사해 그들의 진술들과, 지역 남월남군 정보대의 의견 등을 취합하여 그 날의 현장 상황과 정황을 채 사령관에게 직접 보고 하게 된다. 이에 채명신 사령관은 사건 관련 여단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한달 정도 지나 1968년 6.4일 주월 미군 사령관에게 직접 답신을 작성하여 보냈는데; 그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국군이 해당 마을에 진입,수색한 시간과 사건발생 사이는 2시간의 차이가 나며, 해당부대원 들이 양민을 잔인하게 무차별 학살 할 수가 있는 입장과 정황 여건이 될 수 없었고, 미군의 보고서처럼 지역 주민의 주검을 그렇게 까지 잔인하게 훼손 할 이유가 한국군에게는 없었습니다. 장군께서도 아시는 것 같이, 그동안에도 지역의 주민과 대민 활동으로 신뢰를 얻는 한국군을 중상모략하기 위해, 한국군으로 가장 해 마을을 공격하는 사건들이 한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중부지역 격전지에서 수 없이 연출 된 바 있었음에 따라, 게릴라들의 위장 공격 활동으로 간주 되는 현장의 의견이 (지역 월남 군사 행정 지휘관 포함) 있었다는 점을 사령관께서 확인 하시고.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0). 이렇게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설명한 답신을 받고, 주월미군 사령관 모오렌 장군이 어떻게 조처 하였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이후 미군 사령부는 이 사건에 대한 의견이나 협의가 더 이상 전혀 없었고, 한-미 관계는 파월 참전 연합군으로서의 협력 상태가 종전처럼 원만히 진행 유지되고 있었다.

 

(11).전쟁이 계속되던 1969년,2월에 들어, 한국군에 대한 사건 당시의 꽝남성 자체 조사결과와 한국 해병 여단의 구호품 지원으로(지역민에게 물의를 일으킨 미안한 마음과 일상구호)그동안 다소 안정되었던 퐁니마을 유족들이 사건 1주기를 맞아 월남인 특유의 기질을 발휘 하며 자유월남 국회 의장에게 국가 배상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전달하는데, 이것을 계기로 이 사건은 남월남 국회에 의해 다시 조사 하도록 촉구되고, 월남 정부는 진상조사의 공정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주월 미군 측의 도움으로 미-월 군사 합동 특별 조사팀을 긴급 구성 하게 된다.

 

(12). 합동 조사팀은 30일 간의 집중 조사에 대해, 사건 현장에서 심도 있는 물증 조사 등을 오랜 기간 수차례 벌렸으나 한국군이 학살 사건에 연루 되었다는 확정적 증거를 얻지 못하고, 한국군 복장으로 위장한 베트콩들의 소행인지, 아니면 중부 지역 평정 임무를 성공적으로 담당하는 한국군의 작전을 근원적으로 방해 할 목적으로 월남 전쟁에 참전하고 있는 북조선 심리전 전투 요원들의 위장 전술에 의한 침투 공작인지 등을 파악키 위해 심혈을 기우렸지만, 당시의 사진과 목격자 증언에 의한 사체의 훼손이 상당히 악의적 이었다는 사실 이외는 어느 입증할 근거를 역시 찾지 못 했으며,마을 주민들의 각각 다른 증언에 의해 한국군이나 월맹군 포대, 또는 미군 함대로 부터의 오인 포격이 아닌가 하는 부분까지 조사의 범위를 확대하여 면밀히 수사를 벌렸으나 전선이 없는 지역의 각종 장애 여건 때문에 사건의 원인을 정확히 밝혀 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사건 지역의 마을에 진입한 한국군에게 집중의혹을 갖고 혐의 초점을 맞추며 처음부터 세세한 조사를 시작 하였다.그러나 수사팀은 결과적으로 한국군이 주민 학살을 발생 시켰다는 확정적 최종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는 조사 결과를 요약해 국회의장에게 직접보고 함으로서 이 문제를 종결하게 된다.

 

(11).월남전 당시 한국군에 관한 이 사건은 한미 양국 사령관이 공식 서신을 주고받은 이후, 한미 양국 간에 오해된 일로, 한국군 관련 미군 측 의혹 보고서는 하나의 주월미군 일반기록으로 미 군서류에 보관되었고 더 이상 세상에 표면화 되질 않았다. 결국 퐁니, 마을 사건은 한국군 해병 2여단 1 대대 1중대가 저지른 집단학살 사건으로 당시 판명 된 적이 없이 완전 일단락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문서는 32년 후, 미 국립문서보관소의 기밀 해제를 통해 고경태가 입수해 긴요히 써먹은 허위 사실 시나리오의 재료가 되는데, 주월미군의 정기적 전사 기록이 어떻게 문서 보관소로 남게 되었는지 그 과정과 경위, 그리고 그로인해 파생된 일련의 사건 등을 살펴보면;

 

(12). 1969년 하순 어느 날, 주월 미군사령부 감찰부 샘 샤프 대령은 보관된 과거 서류 뭉치에서 꽝남성 퐁니마을 한국군 관련 사건 보고서를 열심히 찾아, 참모장 젠트 소장에게 건네준다. 당시 미 국방성은 “ 베트콩 정치 양상에 관한 보고서” 라는 과제를 미국의 싱크 탱크 “랜드 재단“에 용역 의뢰 하였고, 미 의회 반 한국 모임인 싸이밍턴 군사소위원회는 박정희의 쿠테타 정권을 궁지에 몰기위해 한국에 대한 군사 원조와 “ 파월 한국군 잔혹행위 의혹”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대 한국 청문회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과거의 꽝남성 보고서는 싱크 탱크 용역 팀을 거쳐 미의회 군사소위원회의 청문 도마 위에 올려 지게 된다.

미의회 청문회에 출두하여 진술과 소명을 해야 하는 한국정부는 박대통령의 특명으로 해병 2여단 사건의 진위를 소상히 밝히기 위해 중앙정보부가 당시의 해당 장병들을 일일이 직접 조사하여 그 결과를 미 정부 당국에 상세히 알려 주었고, 청문회에서 한국의 정부 관료와 미국 정부 측 관계자가 당당히 내용의 진실을 소명하게 된다.

싸이밍턴 소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한 여러 자료와 청문회 등의 증언을 종합 심사한 결과, 꽝남성 1중대 사건 등을 한국군 학살로 단정하지 못하고 “잔혹행위 의혹”이라고 만 규정 한 후, 이 관련 문서를 미 문서보관소에 보관해 두게 되었다. 그리고 보관 기간 32년이 지난 2000년, 한겨레 고경태는 공개된 당시의 보고서 그 자료를 주제 삼아 가짜 뉴스를 제작 세상에 허위 사실을 진실인양 유포하고 있는 것이다.

 

 

2. 당시 현장의 상황과 정황을 근거로 한 사건의 허와 실, 그리고

고경태의 서술기록과 주장에 대한 부당함과 비논리를 반박한다.

 

(1). 한겨레의 고경태는 언론에 종사하는 기자라면서 “의혹과 판명, 그리고단정”이라는 단어의 뜻도 제대로 구별치 못하는 상당히 무지한 인간이다.

고경태가 참고하고 제시한 어떤 자료 등에도 의혹이란 표현은 있어도 한국군의 학살로 단정하거나 규정한 것들은 하나도 없다. 그는 문장이나 주장에서 묘사되는 용어의 개념조차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또한 스스로가 이 사건에 대해 직접 기록한 글에도 “추정” 된다는 표현을 여러 번 사용하고 숙지했음에도, 자기 자신은 말의 뜻이 아주 다른 “확정” 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 사건은 한국군의 학살이라고 엉뚱하게 주장,유포하는 정신병적 억지를 쓰고 있다는 걸 우선 지적한다.

 

(2). 꽝남성 아래에 위치한 꽝응아이성에서 똑같은 종류의 작전을 28회 이상 수행하고, 꽝남성으로 주둔지를 이동 한 해병 2여단 각 부대들은 퐁니가 남월남군과 미군이 보호 관리하고 지원하는 마을로서, 연합군 간의 사전협의를 통해 무조건적 발포를 해서는 안 되는 “발포 제한구역”이 설정된 마을임을 사전에 이미 알고 있었고, 일반적으로 안전 마을이나,귀순자들을 보호하는 전략촌의 수색이나 정찰은 극히 삼가 하고, 사전의 허가 없이는 마을진입을 하지 않는 편이기 때문에 (퀴논의 맹호부대가 끄 몽 고개 지역에서 귀순 마을을 보호 한 것처럼,한국군들도 마을 구호 대민 사업을 많이 실시를 했던 관계로.) 당시 조심스레 퐁니 마을에 진입 했고,수색 경계하는 동안 1.2,3 소대 행군 대열 중간에는 작전지침에 대한 군법적 심리 부담을 갖는 중대장이 지휘하는 본부 소대가 존재 하고, 함포와 항공 지원을 위한 미군 무전병 2명이 파견, 동행하는 현장의 상황에서, 이 마을에 관련된 특수성을 무시하고 한국군이 무차별, 잔악하게 주민 살상을 감행 해 마을을 멋대로 초토화 시켰을 개연성은 지극히 희박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게 정설이다.

 

(3). 만일 연합군이 지원하는 전략촌, 퐁니 마을 주민 피해 사건이 당시 남월남 정부조사에 의해 한국군에 의한 것으로 판명 되었다면, 무소불위의 기세로 거침없었던 월남의 언론들이 벌떼가 되어 대서특필하고 콧대가 세기로 유명한 자유월남 정부의 강력 항의로 중대장과 관련 장병들은 물론, 해병 여단의 상급 지휘관 모두가 군법회의 회부 등의 엄중한 문책을 면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연합군들과 한국군이 쉬쉬하며 자기들끼리 숨겨 무마하려 해도, 특종 사냥을 기다리는 전 세계 유수언론들이 진을 친 당시의 월남 사회에서는 비밀이 절대 보장 될 수가 없는 것이다. 퐁니 사건이 후,해병 2여단 1 중대장 김석현 대위는 사건 물의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해 3월에 조기귀국 조치되었다.

 

(4).또한 반대 측면에서 가정해 이 사건에 관한 정황을 살펴보는데, 당시 각 기관의 수차례 현장 조사 결과, 만약 한국군 1 중대가 저지른 사건으로 진상이 판명되었다면,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는 비정규군 유격 전쟁인 월남전에서 지역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고 참전 병력의 희생만 치른다는 게릴라전의 전문가 채 사령관의 확고한 경험적 신념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파월군의 엄격한 작전 지침과 군령에 따라, 한국 정부는 관련자 전원을 군 형법 위반죄로 처벌하는데 주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군조직의 일원이고 참전 상황 일지라도 개인이나 소수집단이 대한민국 군법과 국제 관련 협약을 위반 하였을 경우, 특정 개인에게 책임을 물어 법적 조치를 취하는 것이 전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임을 알고 그동안 군인 개인이 명령이나 지침을 어기고 저지른 범죄에 대해 군 당국이 엄히 의법 처리 해왔던 전례처럼 법대로 조치하기만 하면 되는데,

파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범법행위를 회피하거나 감싸고 두둔해야 할 이유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어는 전쟁에서도 그러 하듯이 군법을 어긴 관련자들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여 법의 정신을 충실히 실행하고 군의 기강을 확립해야 하는 책무가 군 지휘관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5). 유교적 의식 세계에서 죽은 자에 대한 사체 훼손을 금기시 하는 전통적 풍습에 따라, 한국인들은 목격자들의 주장과 현상대로 여성이나 어린이 노인들을 그리 무자비하게 살상하는 것을 생활에서 배우지를 못했다.(공산주의 자들을 제외하고는)그런 한국인이 무엇 때문에 주민과 동료들 목전에서 그리 잔인한 고의적 시체 훼손을 하겠는가? 그리고 무고한 자유월남 시민을 그렇게까지 죽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6).고경태와 구수정이 기획하여 만든 추리 시나리오에 의하면, 민가 수색 작전 때 마다 한국군은 주권을 가진 국가도 없고, 국제 사법 규정도 없는, 그리고 공유 작전을 하는 연합군 등, 아무도 없는 무법천지의 월남 땅에서 안하무인 적 본색을 드러내 아무에게나 마구 총질하고 사람들을 무차별 죽이는 무법자 살인마 로 상습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좌익들의 전형적 학살선전 수법)

(7).고경태가 한국군의 만행이라며 세상에 유포하는 퐁니,퐁넽 사건은 당시의 월남국내는 물론 세계 어느 언론에도 확정보도 된 사실이 없어 진실이 아닌데도, 고경태는 이 사건을 확연히 입증 할 직접적 어떤 증거나 근거를 갖고 있지 않아, 아무것도 제시 하지 못하고 있다. 오직 월남인들의 막연한 전쟁 상념에 대한 꿰맞쳐 진 일방적 증언에만 의존 할 뿐 이다.그의 서술에서도 자신 스스로가 고백 했 듯이, 2014년 그가 퐁니 마을을 방문하여 디엔안사 인민 위원회를 통해 이 사건에 관한 오래전 자료들을 찾았으나, 결국 수수문 해 갖고 온 자료집은 고경태가 2000년 10월, 미 국립문서 보관소로부터 기밀 해제 된 싸이밍턴 문서를 입수해, 한겨레 21에 이 사건을 꾸며서 발행 했던 과거 책자 하나 뿐 이었다.

그리고 전쟁 당시 자국 양민이 부당한 피해를 입은 사건들에 대한 월남의 반응은 주민은 물론, 국내 언론이나 정부는 놀라울 정도로 거침없고 즉각적이었음을 세상이 다 아는데, 이 우둔한 고경태는 한국군과 미군 당국이 미국 언론의 보도를 은폐해 잘 막았기 때문에 당시 이 사건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아직까지 믿고 있는 것이다. 당시 월남은 유럽 등 세계 언론이 누비고 다녀,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뉴스의 광장 이었다는 걸 모른 체 하면서 말이다.

 

(8). 월남전 당시 한국군이 주둔 하였던 지역에서는 월남전에 참전했던 북괴군 심리전부대와 그들 교관에게 고도 훈련 받은 베트콩들이 교관들의 주도면밀한 지휘아래 현지 주민과의 이간과, 교란을 위한 심리 전술의 일환으로, 한국군 복장에 위장하고 안전 마을이나, 군부대를 공격하는 일이 많았다.(짜빈동 전투에서 한국군위장공격 사례 등) 나름대로 베트남 근,현대사를 꿰뚫어 누구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는 고경태는 월남 전쟁에 참전 했고 관여한 북괴군들의 실체와 역할로 인해, 있을 수 있고 또 실제 있었던 한국군 위장에 대한 사실들을 의도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9). 한편, 북쪽 하노이 월맹정부가 병력과 군수물자 보급선으로 이용하는 호찌민루트 쯔엉선 산맥의 내륙 쪽 주요연계 지점인 꽝남성, 그 지역의 인구 80%가 적성 주민들인 관계로, 지역 월남 민병대를 통한 정보수집 등 작전의 원활화를 위해 미 해병3상륙전 사령부가 그동안 심혈을 기우려 지원해온 우호적 마을이 연합군인 한국군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는 반감과 한국군이 사전 협의나 통보 없이 마을에 진입해 사건을 일으켰다는 불쾌한 감정 때문에 미군 측의 한국군 관련 보고서가 작성되지 않았는가, 하는 추정이 가능하기도 하다.

 

(10). 한국군에 의해 직접 피해를 당했다고 이 사건의 현장으로 지목된 곳은 꽝남성 퐁니 마을 뿐 인데, 고경태는 왜 옆 동네 퐁넽 마을도 피해 마을로 포함 시켰을가? 추측하건데,고경태는 이 사건의 추리 시나리오 각본, 각색을 완성하기 위해 그동안 베트남을 4번씩 방문해 현지 마을증언을 시도 했으나 여의치 않아, 그 당시 베트콩 활동을 많이 했던 퐁넽 마을 증언자들의 생동감 있는 주장을 슬쩍 포함시켜, 원래 한국군이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잔악한 집단이라는 나쁜 인식을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을 갖고 옆 동네 퐁넽도 이름 붙여 퐁니,퐁넽이라는 두 이름을 함께 사용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퐁넽은 당시 적성마을 부류에 속함)

 

(11). 고경태가 이 사건의 관련 당사자 소대장들을 만나 입증 될 만한 어떤 실마리를 잡으려고 이리 저리 끈질기게 뛰어 다니다, 사건 발생 1년 9개월이 지난, 1969년 11월 말에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당시의 중앙정부가 이 사건의 관련자들과 심문해 진술된 내용 일부와 1중대 1소대장 이었던 참전자를 만나 들었던 단편적 미확인 대화를,또다른 참전자의 추측성 발언들을 입수해 그것만으로 사건 단정의 결정적 근거로 삼아 보려는 시도를 요즘까지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그의 주장과 서술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고경태의 이런 노력은 그가 지목하는 이 퐁니 사건이 발생하기 전후에도 참전 소대장 등의 하급 지휘관들은 수도 없이 많은 베트콩 마을 소탕작전에 투입되어 퐁니 마을 수색,정찰과 똑같은 형태의 작전상황을 반복 연출함으로서 현장에서 전개된 경험적 형상이 그들 뇌리에 그대로 각인되었기 때문에, 수년의 오랜 시간이 경과된 후 어느 시점의 사건을 회상하려면 그 때의 상황이 정확히 구별되지 않고 혼합된 현상이 나타나 기억의 혼동을 가져왔던 관계로 기대한 성과를 얻지 못하게 된다. 그때 거기서 그렇게 총을 쏜 것 같고 저때 저렇게 수색하면서 동굴에 수류탄을 던진 것 같은 기억의 혼선으로 착각을 하게도 되는 것이 인간의 일반적 기억력인데, 당시의 오래된 기억들은 인지력이 미약하여 신뢰되기 어려운 점을 감안하면, 일부 참전자의 부정확한 단편 기억력에 의존하여 퐁니 마을 사건에 한국군이 연루 되었다는 고경태의 일방적 단순 추정은 이사건의 결정적 단서로 볼 수 없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맺 는 말

 

(1). 전쟁 당시 자국 국민의 피해에 대해 철저한 진상조사를 마쳤던, 당사자국 자유월남 정부도 사건의 원인을 확정적으로 밝히지 못했고, 주월 한국군의 엄격한 군령을 세우고 국익의 손상을 막기 위해 한미월 군수사대와 한국의 국가 최고 수사기관이 규명치 못해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한, 이 사건을 단지, 미증유의 임의 판단과 단순 정황을 토대로 작성된 주월 미군의 현지 보고서와 출처 미상의 사진 자료들을,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의 파병 관련 미 정부 원조에 불만을 품고 반 한국 활동을 일삼아온 미 의회 싸이밍턴 소위원회가 활용함으로서 “한국군 잔혹 행위 의혹”에 관한 청문회문서는 오랫동안 보관 되었고 32년 후, 미 국가 보관소로 부터 기밀 해제 공개되자 이를 입수, 악용하여 “의혹” 이란 문구가 분명 명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악의적으로 한국군이 양민을 집단 학살 한 사건으로 확정, 단정 하면서 거짓을 무차별 유포하는 천인공노 할 패륜적 못된 짓을 쿠바의 붉은 혁명가 체 게바라를 즐겨 논하는 고경태가 자랑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다.

 

(2).베트남 국민들이 말하지 않고 베트남 정부가 시비하지도 않는 허위사실을 지속적으로 유포하며 자기 조국의 국군을 폄훼, 모략하는 구수정과 고경태의 악질적 행위에 대해, 무고한 월남 양민을 희생시킨 사실이 전혀 없는 파월 한국군 참전자들은 이제는 사회 본연의 보편적 논리를 내세워 원천적 방법으로 대응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즉 참전자들은 이렇게 주장해야 할 것이다.

“너희들 주장이 맞다 생각하면,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등의 육하원칙에 의해 파월 한국군의 군령을 위반해 범법을 저지른 당시의 개인 각자들을 직접 찾아내라. 그다음에 그들을 비난하고, 월남피해자로 하여금 법적 대응 하도록 조치해주기 바란다. 당시 참전은 같이 했지만, 니들이 주장하는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다른 32만명 파월군들은 네놈들 농간과 우롱에 놀아나며 지탄 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파월 국군은 대한민국 국회와 그 정부의 법절차, 그리고 국민의 동의, 국제간의 정식 협의 과정을 거쳐 당시 합법적으로 대한민국의 제 2 전선이 된 월남 전쟁에 파병 되었다. 그러하니 참전자 전원을 한데 묶어 매도하지 말고, 너희들 생각대로 전쟁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찾아내 그 책임을 물어라. 무리들 중에 잘못된 사람이 있다면, 지목하고 가려내 잘못을 묻는 게 사회적 통념이다. 그러기위해 규칙과 법률이 국가에 존재 하는 것이다.”

 

(3).위에 기술한 논박은 한겨레 고경태가 악의적으로 저술한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퐁니, 퐁넽 학살 그리고 세계” 라는 책자의 내용을 참고,인용함으로서 그가 지금까지 어떻게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꾸며 허위로 이 사건을 조작, 왜곡 했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왜 진실이 될수 없는지를 객관적 사실과 논리적 정황 원리로 주요 쟁점을 해석하고 논박함으로서, 잘못 인식되어온 이 사건의 역사적 진실을 올바르게 규명하여 훼손된 참전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중요한 일에 작은 보템이 되고 져 국가관이 삐뚤어진 고경태의 주장과 그릇된 논조를 바탕으로 작성하게 된 반박문 이다.

 

                                                                2018. 2. 12

 

                                                      베트남 전쟁사 연구원 케리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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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웅전우님  대단히 고맙습니다.
저도 강기웅전우님 글에 동감합니다. 구수정,  고경태  이들은  의혹을 부풀리는  표현 능력을 뛰어나지만  사실을 입증하는 능력이 없는것 같습니다.언론에 자유도 확실한 입증이 없으면 처벌 받아야 한다는 기본상식도 없는것 같습니다.사회는 물론 군인도 무고한 사람들을 살상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엄중한 사실을 모르고 있는것 같아요.
한겨레21.256호(1999년5월6일)로 부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20여년간 참전군인들을 양민학살로 몰아가고 있습니다.이들이 주장하는 자료 모두가 당시 적군들이 생산한 자료로써 아직 검증되지 않은 베트남쪽의 일방적인 자료를 가지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 두사람 수법이 아주 교활하여  '' 치고  빠지는 베트콩전술,, 그데로 답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기면기고, 아니면 말고..
참전군인들에 고귀한 희생정신들을 생산하여야할  남베트남정부는 망하고 말았습니다.참전전우에 희생정신을 글로 옮겨야할  남베트남사람들이 단 한명도 없다는 사실입니다.구수정,고경태 양민학살  음해에 말려들지 않도록 살아있는 전우들이라도 힘을 합쳐야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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